압정 위에서 버틴 꿈…13살 소년공, 행정가가 되다 [이재명의 삶<상>]
  • 김세정 기자
  • 입력: 2025.06.04 02:36 / 수정: 2025.06.04 05:38
법을 몰랐던 공장 소년…인권변호사의 길로
성남서 실험하고, 경기도서 증명한 행정
이재명 당선인은 1989년 제2의 고향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판검사가 될 수 있는 상위권 성적이었지만 도시빈민, 공단 노동자 등 자신 같은 사람들을 위한 변론을 이어갔다. 변호사 시절 이 당선인의 모습. /민주당 제공
이재명 당선인은 1989년 제2의 고향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판검사가 될 수 있는 상위권 성적이었지만 도시빈민, 공단 노동자 등 '자신 같은 사람들'을 위한 변론을 이어갔다. 변호사 시절 이 당선인의 모습. /민주당 제공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13살, 남의 이름을 빌려 공장에 들어간 소년. 펄펄 끓는 화덕과 화학약품 냄새 속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임금을 받지 못해도, 프레스기에 팔이 끼여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소년공에게 법은 흐릿했다. 존재는 했지만 결코 그의 편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따뜻한 삶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공정한 세상'에 대한 갈망은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민주당 대표를 거쳐 수많은 정치적 난관을 통과한 끝에 2025년 6월 3일, 국민은 그를 대통령으로 택했다.

이재명 당선인은 1976년 2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성남의 빈민촌 상대원시장 꼭대기 월셋집으로 이사했다.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3살부터 소년노동자가 됐다. 이 당선인의 초등학교 졸업장과 가족사진. /민주당 제공
이재명 당선인은 1976년 2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성남의 빈민촌 상대원시장 꼭대기 월셋집으로 이사했다.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3살부터 소년노동자가 됐다. 이 당선인의 초등학교 졸업장과 가족사진. /민주당 제공

◆ 이름도 없던 소년공…프레스기 사고까지

1964년 경북 안동 예안 도촌리.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재명 당선인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절대빈곤이었다. 산나물을 캐 먹으며 허기를 달래야 할 정도였다. 19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당선인의 가족은 경기 성남 상대원시장으로 터를 옮겼다. 아홉 식구가 빈민촌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현실에서 중학교 진학은 사치였다.

13살, 법적으로는 취업이 불가능한 나이였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동네 형의 이름을 빌려 성남의 고무공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6년간 '이름 없는 소년공'이 됐다.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3개월을 꼬박 일하고도 사장이 야반도주해서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냉동회사에서 함석판을 접고 자르는 일을 하며 몸에는 100개가 넘는 흉터가 남았다.

1979년 시계를 만드는 오리엔트공장에 다니던 시절 남이섬으로 야유회를 간 이 당선인(왼쪽에서 첫번째). /민주당 제공
1979년 시계를 만드는 오리엔트공장에 다니던 시절 남이섬으로 야유회를 간 이 당선인(왼쪽에서 첫번째). /민주당 제공

가장 아픈 기억은 다섯 번째 공장에서였다. 스키장갑과 야구글러브를 만드는 프레스기에 왼팔이 끼면서 성장판이 손상됐다. 평생 굽은 팔로 살아야 하는 장애를 얻었다. 이 때문에 군대도 갈 수 없었다. 장기간 화학약품에 노출된 탓에 지문과 후각도 상당 부분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형의 회상에 따르면 고무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이 당선인의 얼굴과 온몸에는 검은 고무가루가 쌓여 있었지만, 언제나 "엄마!"하며 어머니 품에 살갑게 안겨 힘든 내색 없이 늘 밝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1978년 고입 검정고시 시험 응시원서 사진(왼쪽)과 학력고사 수험표. 1981년 학력고사에서 전국 3000등 이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이 당선인은 전액 장학금에 매달 생활비 20만원까지 지원해 주는 혜택을 받고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민주당 제공
1978년 고입 검정고시 시험 응시원서 사진(왼쪽)과 학력고사 수험표. 1981년 학력고사에서 전국 3000등 이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이 당선인은 전액 장학금에 매달 생활비 20만원까지 지원해 주는 혜택을 받고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민주당 제공

◆ 압정 뿌린 책상에서 꿈꾸다

처절한 환경에서 탈출하려면 공부뿐이었다. 공장 관리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며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마쳤다.

대학 진학을 결심한 순간부터 그의 하루는 더욱 처절해졌다. 낮에는 공장에서 12시간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며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하루 수면시간은 2시간이 전부였다.

몰려오는 졸음이 가장 큰 적이었다. 이를 떨치기 위해 독서실 책상에 압정을 뿌려놓고 공부했다. 압정이 몸에 박힌 채 잠들기도 했다.

그 절박함은 기적을 만들었다. 1981년 학력고사에서 전국 3000등 이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인권이 유린당한 삶에서 벗어나고픈 지독한 갈망이 만든 결과였다.

전액 장학금에 매달 생활비 20만원까지 지원해 주는 혜택을 받고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는 대학 입학식에 교복을 맞춰 입고 갔다. 중·고등학교에 대한 로망이 그토록 컸던 것이다.

학창 시절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 당선인은 대학 입학식에 교복을 맞춰 입고 갔다. 1982년 입학식 당시 어머니와 이 당선인의 모습. /민주당 제공
학창 시절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 당선인은 대학 입학식에 교복을 맞춰 입고 갔다. 1982년 입학식 당시 어머니와 이 당선인의 모습. /민주당 제공

◆ 법복 대신 인권변호사를 택하다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대였지만, 생명줄 같았던 대학생 신분을 잃을 수는 없었다. 이 당선인은 학생운동 대신 공부를 택했다. 제도권 안에서 사회 문제를 개혁하겠다는 다짐이었다.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판검사가 되면 집안 살림도 한층 나아질 터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들은 노무현 변호사의 강의가 결정적이었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1987년 7월 14일 일기장에 남긴 글이다. 이 당선인은 소시민의 길을 택했다.

이 당선인은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들은 노무현 변호사의 강의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사법시험 합격 당시 기사(왼쪽)와 변호사 시절 이 당선인의 모습. /민주당 제공
이 당선인은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들은 노무현 변호사의 강의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사법시험 합격 당시 기사(왼쪽)와 변호사 시절 이 당선인의 모습. /민주당 제공

◆ '소년공 이재명'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1989년 제2의 고향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성남의 도시빈민, 공단 노동자 등 '자신 같은 사람들'을 위한 변론을 이어갔다. 그의 눈에는 월급을 떼이고 구타를 당해도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몰라 절망하던 '소년공 이재명'이 현실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1995년 성남시민모임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시민운동가의 길에 본격 발을 들였다. 성남시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 의혹,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을 고발하며 부동산 카르텔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당선인은 1991년 아내 김혜경 여사와 결혼했다. 슬하에는 두 아들 동호 씨와 윤호 씨를 두고 있다. 이 당선인과 김 여사가 아들 동호 씨와 찍은 사진. /민주당 제공
이 당선인은 1991년 아내 김혜경 여사와 결혼했다. 슬하에는 두 아들 동호 씨와 윤호 씨를 두고 있다. 이 당선인과 김 여사가 아들 동호 씨와 찍은 사진. /민주당 제공

◆ 교회 지하실에서 울던 날

인생의 전환점은 2003년이었다. 성남시 종합병원 두 곳이 동시에 폐업하자 공공의료기관 설립 운동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수술비 45만원이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실 뻔했던 아픈 기억 때문이었다.

'성남시민 10만 서명 운동'을 전개했고 성남 시민의 절반에 가까운 20만 명이 참여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장악한 시의회는 아무런 토론 절차 없이 47초 만에 조례안을 부결시켜 버렸다. 성남시의회에 강하게 항의하다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고발돼 수배된 그는 2004년 3월 28일 성남주민교회 지하기도실에 몸을 숨기고 현실의 벽 앞에 서럽게 울었다.

그날, 그는 결심했다. "정치를 해야겠다."

이 당선인은 2010년 세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51.2%의 득표율이었다. 2015년 <더팩트>와 인터뷰 당시 이 당선인의 모습. /더팩트DB
이 당선인은 2010년 세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51.2%의 득표율이었다. 2015년 <더팩트>와 인터뷰 당시 이 당선인의 모습. /더팩트DB

◆ 두 번 낙선 끝에 성남시장으로

첫 정치는 실패였다. 2006년 성남시장 선거,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잇달아 낙선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2010년 세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51.2%의 득표율이었다.

취임 당시 성남시는 호화 청사 건립 등으로 6500억원이 넘는 부채에 허덕이고 있었다. 지방정부 최초 '모라토리엄(지불유예 선언)'을 선언했다.

부정부패, 예산낭비, 세금탈루를 없애 아낀 예산으로 복지를 강화하는 '3+1 원칙'을 바탕으로 3년 만에 재정 정상화를 달성했다. 복지예산 비중을 늘리는 와중에도 부채를 줄이며 재정 정상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복지는 돈 문제가 아니라 철학 문제"라는 그의 철학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이 당선인은 성남시장 시절이던 2016년 박근혜 정부의 지방재정개편에 반발해 광화문광장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새롬 기자
이 당선인은 성남시장 시절이던 2016년 박근혜 정부의 지방재정개편에 반발해 광화문광장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새롬 기자

청년배당, 무상교복, 산후조리 지원 등 '3대 무상복지 정책'을 추진했다. 65세 이상 노인들이 한 달에 20시간 일하면 10만원을 지급하는 '소일거리 사업'도 시작했다. 무엇보다 오랜 꿈이던 성남시립의료원을 설립했다. 2004년 교회에서 울던 서러움 끝에 9년 만에 이룩한 결과였다. 훗날 코로나19 상황에서 공공병원의 역할이 주목받으며 성남시립의료원의 의미도 재조명됐다.

'열린시정'도 그의 특징이었다. 시청 대부분의 시설을 시민에게 개방하고 SNS로 소통을 강화했다. 2011년 성남시는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로부터 5년 연속 '최고등급'을 받았다.

이 당선인은 2017년 19대 민주당 대선 경선에 도전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2018년 6월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당선됐다. 20년 만에 민주당계 도지사였다. 2018년 지방선거 유세 당시 이 당선인 모습. /남윤호 기자
이 당선인은 2017년 19대 민주당 대선 경선에 도전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2018년 6월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당선됐다. 20년 만에 민주당계 도지사였다. 2018년 지방선거 유세 당시 이 당선인 모습. /남윤호 기자

◆ 경기도서 꽃핀 실험정신

2016년 박근혜 정부의 지방재정개편에 반발해 광화문광장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 때는 정치인 최초로 퇴진을 주장했다. 인지도를 크게 올린 그는 2017년 19대 민주당 대선 경선에 도전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2018년 6월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당선됐다. 20년 만에 민주당계 도지사였다.

'새로운 경기, 공정한 세상'이라는 기조 아래 또 한 번 실험을 시작했다.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해 골목상권을 살리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코로나19 때는 도민 전체에 1인당 지역화폐 10만원의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했다.

전국 최초 24시간 닥터헬기를 도입했다. 수술실 CCTV도 전국 최초로 운영해 나중에 전국 확산의 물꼬를 텄다. 2021년 법제화까지 이뤄졌다. 도내 계곡 불법업소 96%를 1년 만에 정비했다. 물리력 동원 없이 상인들과 토론으로 해결하는 모습이 전국적 화제가 됐다.

13살 소년공에서 경기도지사까지. 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인 1300만 경기도민의 수장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42년이었다. 그의 행정은 언제나 실험적이었다. 반대도 많았지만 국민이 원하고, 당위성 있는 정책은 기득권 반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추진하겠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남윤호 기자
13살 소년공에서 경기도지사까지. 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인 1300만 경기도민의 수장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42년이었다. 그의 행정은 언제나 실험적이었다. 반대도 많았지만 국민이 원하고, 당위성 있는 정책은 기득권 반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추진하겠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남윤호 기자

◆ 첫 번째 기적의 완성

13살 소년공에서 경기도지사까지. 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인 1300만 경기도민의 수장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42년이었다. 그의 행정은 언제나 실험적이었다. 반대도 많았지만 국민이 원하고, 당위성 있는 정책은 기득권 반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추진하겠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재명의 첫 번째 기적은 이렇게 완성됐다. 하지만 진짜 꿈은 따로 있었다.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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